의주의 토호이자 의주만호인 장열(張烈)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아 만호가 되었는데 그 무예가 뛰어나 이성계가 뽑아 가까이하였고, 위화도 회군 당시 그를 따라 회군공신에 서훈되었다. 1390년(공양왕 2) 밀직부사를 거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1392년 아우 장사정과 함께 조선 개국에 참여하여 7월 17일에 좌명일등공신(佐命一等功臣)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화녕군(和寧君)으로 봉해졌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안대군 방원(芳遠) 편에 참가하여 정사이등공신(定社二等功臣)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영가군(永嘉君)에 봉해졌다가 이후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판공조사(判工曹事)·의흥삼군부우군절제사(義興三軍府右軍節制使)가 되고, 이어 화산군(花山君)으로 개봉되었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당시 반역을 꾀했다는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비호로 벌은 받지 않았다. 의흥친군위동지절제사(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 우군도총제(右軍都摠制),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등을 지냈으며,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에 봉해져 관직에서 물러났다. 음력 10월 30일 졸하였다. 시호는 희양(僖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