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3년 11월 11일 부왕에 의해 공동 독일 국왕으로 임명되었다. 1056년 아버지 하인리히 3세의 사후에 6살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무능한 모후 아그네스의 섭정으로 인해 그의 지위는 상당히 위태로웠다. 반대 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하여 독일 내 권력 장악에 성공하기도 했지만 장남 콘라트와 차남 하인리히 5세의 반란으로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어린 시절
하인리히 4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하인리히 3세와 아그네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고슬로에서 태어났다. 원래 기독교에서 세례는 태어난 직후 받는 유아세례가 일반적이지만 그뤼니 수도원의 프고를 대부(代父)로 맞이하기 위해 다음 해 봄 부활절까지 세례를 연기했다. 세례를 받기 전 아버지 하인리히 3세는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여 크리스마스에 궁정에 모인 제후들에게 복종을 요구했다.
즉위
1053년 아버지 하인리히 3세는 아직 어린 아들이 후계자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귀족회의를 열었고, 1053년 11월 11일 아버지 하인리히 3세에 의해 로마의 왕(하인리히 3세 시대부터 독일 국왕을 칭하는 칭호)으로 선언되었다.[1] 1054년 7월 17일 퀠른 대주교 베르만에 의해 왕관을 수여받았다. 이로써 정식 후계자 수속을 밟았기 때문에 하인리히 3세가 1056년에 갑자기 사망했을 때, 특별한 문제없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6살의 어린나이에 즉위하였기에 모후 아그네스가 섭정하였다. 그러나 모후가 무능하였는데, 정치적 오판으로 왕권의 기반을 이루던 바이에른, 슈바벤, 케른텐 등을 귀족들에게 나누어 주며 자치권을 부여하였다. 자치권을 얻은 귀족들은 독자 노선을 걸었고 왕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1062년 쾰른 대주교(안노 2세)가 하인리히 4세를 납치한후[2][3] 모후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결국 모후는 섭정에서 물러났고 권력을 차지한 안노 2세는 개혁파 교황을 옹호했다.[4] 1065년 친정을 시작했으나 왕권은 불안정하였다. 독일 군주의 힘이 약해지는 사이에 로마 교회는 교황권을 강화하여 세속군주가 교황 선출과 성직자 서임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이에 반발하였다. 카롤링거 왕조 때부터 약 300년간 독일 군주가 행사해왔던 권리를 포기할 수 없었다.
1075년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의사를 무시하고 밀라노에 대한 서임권을 행사해 자신의 뜻에 부합되는 사제를 임명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1076년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황제가 교황을 폐위하는 경우는 무수히 많았으나 교황이 세속군주를 직접 파면하고, 폐위하는 일은 4세기 기독교가 국교화 된 이래 단 한 번도 그 선례가 없는 일이였다.[5][6][7] 아무튼 하인리히 4세가 파문을 당하자 작센 선제후등의 독일 지역 제후들이 하인리히 4세에게 반기를 들었고 하인리히에게 상황이 매우 불리해졌다.
교황에 의해 파문을 당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을 직접 만나 용서를 구하고 파문 철회를 요청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향했다. 하인리히 4세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가 군대를 이끌고 오는 것으로 생각하여 카노사성으로 급히 도피한다.[8][9][10][11] 1077년 1월 25일 카노사성에 도착한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 성 밖에서 3일 동안 교황에게 용서를 구하고, 파문의 해제를 간청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으로 교황 권력이 황제 권력보다 우위에 서게 되는 전환기이자 과도기에 벌어진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12] 그레고리오 7세는 파문을 해제했으나, 폐위의 위기에서 벗어난 하인리히는 귀국 후 교황에 대한 적대 행위를 재개했다.
복수
파문 철회에 반발하며 독일 지역 제후들은 1077년 3월에 하인리히 4세를 대신해 슈바벤공 루돌프를 새로운 대립왕으로 추대했다.[13] 하인리히 4세는 즉각적으로 바이에른 공작령과 슈바벤 공작령에 대한 몰수 조치를 취했고 내전이 벌어졌다. 1080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루돌프를 새로운 독일왕으로 승인하면서 하인리히 4세를 재차 파문하였다.[14][15][16] 그러나 파문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17] 1080년 10월에 벌어진 전투에서 하인리히 4세가 패배했으나 전투중에 루돌프는 오른손이 잘리는 부상을 입고 그 다음날 사망하고 말았다.[18]
왕에게 충성 맹세를 했던 손이 잘린 것은 신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18] 반란군의 사기가 저하되었으며 반대파 귀족들은 구심점을 잃고 붕괴하였다. 하인리히 4세는 독일 지역 내 권력 장악에 성공한 후 복수의 기회를 엿보았다. 1080년 이탈리아 원정을 통하여 카노사의 성주 마틸다를 패퇴시켰다. 1081년에 로마로 진격하여 3년의 노력 끝에 1084년 3월 21일 로마를 점령하였다.[14] 하인리히 4세가 로마 정복 후 가장 먼저 한일은 산탄젤로성[19]으로 피신[20]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폐위였다. 그 후 라벤나 주교를 클레멘스 3세[21]로 하여 새 교황으로 옹립한 후 황제 대관식을 1084년 3월 31일에 올렸다.
로마가 하인리히 4세의 수중에 넘어가자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산탄젤로성으로 피신한 후 남부 이탈리아 지역의 지배자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1084년 5월 로베르가 노르만족과 사라센 출신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해오자 하인리히 4세는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독일로 퇴각해 버린다. 로베르가 교황을 구출하러 로마 시내로 진입하자 반-교황파(그레고리오 7세에 반대하는 무리)가 이에 저항하였다.
로베르의 군대는 저항 세력을 진압하며 그레고리오 7세 구출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로베르의 군대는 시가전을 벌이며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였다. 3일간 벌어진 약탈과 방화의 피해는 심각했다.[22] 약탈 책임에 대한 로마 시민들의 원망과 분노가 극도에 달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그레고리오 7세는 로베르의 군대와 함께 로마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살레르노에서 쓸쓸히 망명 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1085년에 그곳에서 객사하였다.
장남 콘라트의 반란
1090년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주선으로 43세의 토스카나 여후작 마틸다가 결혼을 한다. 상대는 독일 남부 바이에른 벨프 가문에 17세밖에 안된 벨프 5세(생몰 1072-1120)였다.[23] 26세의 나이를 뛰어넘는 이 정략결혼으로 독일 남부와 북이탈리아의 하인리히 4세 반대자들은 혼인동맹을 맺은 것이다. 이런 심상치 않은 흐름에 하인리히 4세의 장남 콘라트도 동참하였다. 하인리히 4세는 왕권을 강화하고자 1087년에 장남 콘라트(생몰 1074-1101)를 독일 공동왕에 봉한 바가 있다. 그런데 부왕에 대한 불만[24]이 누적되어 있던 장남 콘라트가 1093년에 마틸다를 비롯한 북부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인, 독일 남부 귀족들과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거사 전에 콘라트는 공모자들에 의해 이탈리아의 왕으로 추대를 받는다.
이번 반란은 교황 우르바노 2세[25](재위 1088-1099)의 충동질도 있었다. 자신에게 충성서약을 한 후 반란에 가담한다면 나중에 황제에 오르게 해주겠다고 콘라트에게 약속을 하였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과거 추기경 시절에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오 7세 간에 있었던 서임권 투쟁 중에 그레고리오 7세를 충심으로 지지했었다. 또한 황제가 옹립한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가 로마를 장악하고 있음으로 인해 자신의 입지가 약해져 있었다. 황제에게 불리한 상황이 발생하도록 만든 후 독일 내 지배력을 저하시켜서 황제의 로마 교회에 대한 영향력을 약화시키고자 반란을 책동했던 것이다.
1095년에 열린 피아첸차 공의회에서는 하인리히 4세의 두 번째 부인 유프락시아가 남편이 잠자리를 강요하고, 의붓아들 콘라트와의 동침을 명령하는 등 비윤리적인 행위를 일삼았다고 증언을 한 후 황제를 고소했다. 물론 모함일 가능성이 다분하지만 콘라트의 반란을 정당화하기에는 적합했으며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이런 왕비의 행위를 지지했다.
반란을 진압하고자 하인리히 4세는 이탈리아 원정[26]을 실시했고 한때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도 했으나 결국 반란을 진압한다. 벨프 5세가 1095년에 마틸다와 헤어졌고, 퇴위당한 그의 아버지 벨프 4세가 1096년에 다시 바이에른을 봉토로 받은 뒤에 반란 귀족세력은 와해되었다. 1097년이 되어 독일로 귀환한 하인리히 4세는 1098년의 마인츠의 왕국 회의에서 장남 콘라트를 폐위시키고,[27] 차남 하인리히 5세를 독일 왕위 계승자로 지정하였다. 아울러 하인리히 4세는 차남 하인리히 5세에게 자신의 살아 생전에는 제국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선서를 시켰다.
사망
하인리히 4세의 서임권 투쟁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재위 1073-1085)때 시작된 후 빅토르 3세, 우르바노 2세, 파스칼 2세 때까지 후임 교황들과 지속되었다. 하인리히 4세가 시종일관 서임권은 자신의 권리라고 주장하자 교황 파스칼 2세(재위 1099-1118)는 1102년 교회회의를 통해 황제의 서임권 행사 금지를 재확인한 후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였다. 하인리히 4세는 1103년 마인츠 제국 의회를 통해 파문 해제를 조건으로 십자군 원정[28]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교황과 화해하지 않는 한 황제로서 온전한 권력을 행사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영주들에게 향후 4년 동안 모든 분쟁의 제한을 명하였다. 그러나 교회와의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자 이에 대해 영주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황제가 자기 아들을 위해 귀족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생전에는 제국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선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귀족들과의 다툼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한 차남 하인리히 5세는 아버지를 희생시켜 자신의 왕위 계승을 확실히 하려고 귀족들과 협약을 맺은 후 1104년 반란을 일으켰다.[29] 교황 파스칼 2세는 하인리히 5세를 지지하였으며 하인리히 4세는 전투에 패하여 쾰른으로 도망쳤다가 마인츠에서 생포되어 투옥된 후, 1105년에 퇴위당했다. 비록 왕위를 잃었지만 포기하지 않던 하인리히 4세는 리에주로 달아났다가 로렌 지방 사람들과 연합해 1106년에 하인리히 5세의 군대를 무찌르며 재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몇 개월 뒤 갑작스럽게 병사하고 말았다.[29]
가족 관계
첫 부인 베르타와 사이에서 3남 3녀를 낳았다. 첫째와 둘째는 요절했고 셋째 아그네스는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1세와 결혼했다가 오스트리아 변경후작 레오폴트 3세와 재혼했다. 넷째 콘라트는 독일 공동 국왕이었다가 이탈리아 국왕으로 선출된 후 아버지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폐위되었다. 여섯째 하인리히 5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올랐다. 두 번째 부인 유프락시아 사이에서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루돌프 k 골트슈미트 옌트너 <세계사의 명장면 그 이면의 역사> 도서출판 달과소 2005.11.28 p60
↑[네이버 지식백과] 하인리히 4세 [Henry IV] - 카노사의 굴욕을 당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독일 왕가, 임동욱)...우왕좌왕하던 황후의 행보는 마침내 반란을 유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062년 쾰른 대주교 안노 2세가 하인리히 4세를 납치하고 황후의 퇴진을 요구한 것이다. 결국 아녜스 황후는 섭정 자리를 내놓아야 했고, 권력을 차지한 안노 2세는 개혁파 교황을 옹호했다
↑자카리아 교황이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인 힐데리히 3세 폐위시켰다고 하며 이를 선례라고 하지만 피핀이 힐데리히 3세를 폐위시킨 후 카롤링거 왕조를 출범시키자 교황은 이를 승인한 것일 뿐이다. 직접적으로 세속 군주를 폐위시킨 선례는 없다.
↑Blumenthal 2010, p. 122. Blumenthal, Uta-Renate (2010) [1982]. The Investiture Controversy: Church and Monarchy from the Ninth to the Twelfth Century.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ISBN 0-8122-1386-6.
↑당시 교황은 허리 디스크로 인한 통증으로 장거리 여행이 어려운 상태였다. 독일 제후들의 초청에 의해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를 출발한 것이 아니다. 로마에서 아우크스부크까지는 1600km가 넘는다. 63세의 노구를 이끌고 겨울철에 알프스를 넘어 장거리 여행을 하기에는 상당한 무리수가 따른다. 하인리히 4세의 무력 도발을 피해 카노사성으로 급히 피신한 것이다.
↑1985년에 그레고리오 7세 선종 90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유골 검사가 실시된바 있다. 이탈리아 의학자들에 의한 검시결과 1077년 당시 교황이 심한 허리 디스크를 앓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바 있다. 자세한 것은 H. 푸어만의 저서 'The Pope"를 참조.
↑[네이버 지식백과] 하인리히 4세 [Henry IV] - 카노사의 굴욕을 당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독일 왕가, 임동욱)...하인리히 4세는 이듬해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논쟁을 결론 내기로 합의해 놓고 곧바로 이탈리아로 비밀 원정을 떠났다. 그레고리우스의 교황 등극을 지원했던 투스카니 여후작 마틸데는 전쟁이 닥칠 것이라 생각하고 교황을 카노사성으로 불러들였다.
↑카노사의 굴욕사건은 교황권의 전성기에 있었던 사건이 아니다. 그레고리오 7세가 1080년에 하인리히 4세를 두 번째 파문하였으나 전혀 효력이 없었다. 그리고 교황은 1084년에 강제 폐위 당한 후 로마 시민들에게 버림받아 로마에서 사실상 추방당했다. 교황권과 황제권이 역전되는 전환기이자 교황 권력이 전성기로 나아가기 위한 초반 과도기에 벌어진 사건이라고 보아야 합당하다.
↑루돌프 k 골트슈미트 옌트너 <세계사의 명장면 그 이면의 역사> 도서출판 달과소 2005.11.28 p83
↑산탄젤로성은 베드로 광장에서 약 800m 떨어진 테베레 강변에 위치해 있다. 로마 시내에 위치해 있기에 결코 외딴 성이 아니다. 요새화 되어 있는 작은 성이며 베드로 성당으로부터 비밀 통로가 놓여있어 교황에게 위급한 일이 발생하면 이 통로를 통하여 산탄젤로성으로 신속히 대피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정태남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21세기북스, 하드리아누스 영묘...하드리아누스 황제가 타계한 후, 이 영묘는 격동하는 로마의 역사와 함께 그 기능도 바뀌어 3세기 후반에는 테베레강 하류 지역을 방어하는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의 일부가 되어 로마를 지키는 견고한 보루가 되었고, 10세기에는 바티칸 궁전을 방어하는 요새가 되었다. 또한 1527년 독일 용병에 의한 로마 약탈 기간 중에는 포위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이곳에 피신해 있기도 했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대립교황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교황 즉위 과정은 정당하며 합법적이었다. 교황 폐위와 신임 교황 지명은 황제의 고유 권한 범위 내에 있었기 때문이다.
↑벨프 5세가 바이에른의 공작이 된것은 1101년이다. 바이에른 공작으로는 벨프 2세가 된다.
↑세 살 되던 해인 1077년 아버지 하인리히 4세와 동행하여 카노사의 굴욕 현장에 함께 있었다. 이후 동맹 귀족들과의 친분을 증명하기 위해 볼모가 되어 부모와 떨어져 객지 타향 이탈리아에 혼자 머물렀다. 1080년 6살 때 귀국했다가 1081년 7살 때 풀리아 공작 로베르의 딸과 혼담 때문에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갔다. 혼인이 불발되었으나 아버지가 부를 때까지 이탈리아에 남아 있어야 했다. 어린 시절에는 이런 식으로 아버지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었다. 1087년 13살 때 공동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른 후 다시 이탈리아로 파견되면서 생모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이로 인해 아버지와의 불화가 깊어지기 시작했다.
↑교황으로서 실추된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타고난 말재주로 광기어린 십자군 전쟁을 촉발시킨 인물이다. 그러나 정작 합법적 교황이라고 자임하는 자신은 1088년 교황으로 선출된 이후 로마에 입성할 수 없었다.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지원하는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가 로마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르바노 2세는 로마에 집착하지 않고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를 누비며 활발한 대외 활동을 통하여 교황의 위상을 높이고 대립교황과 황제 하인리히 4세를 압박하며 고립시키는 작전을 폈다. 이런 그의 행보는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 1095년 프랑스 클레르망 공의회에서 한 명연설을 통하여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도록 만들었고 교황으로서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데 성공했다. 이런 여세를 몰아 대립교황을 밀어내고 1095년경 교황으로 선출된 지 7년 만에 로마 입성에 성공했다.
↑1차 십자군 원정은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재위 1088-1099)의 요청으로 시작되었으며, 1096년부터 1272년까지 총 8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 가나[네이버 지식백과] 하인리히 4세 [Henry IV] - 카노사의 굴욕을 당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독일 왕가, 임동욱).....1104년 하인리히 5세가 아버지의 퇴위를 요구하며 귀족들과 연합해 반기를 든 것이다. 체포된 하인리히 4세는 결국 1105년의 마지막 날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비롯해 독일 국왕, 이탈리아 국왕, 아를 국왕 등 네 개의 직위를 모두 아들에게 넘겼다..(중략)..그는 7월 말 갑작스레 질병을 얻었다. 오늘날 벨기에 리에주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9일 동안 병상에 누웠다가 그는 결국 1106년 8월 7일 쉰여섯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