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11월 6일 황해도평산군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아버지 신태현과 어머니 신순옥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 초등학교 3학년 때 경성부(서울)로 이사해 동대문구 흥인초등학교를 다녔고, 한성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연극부에서 활동했다.[1]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예원좌의 후신인 청춘극장에 입단해 2년 동안 신극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경제적으로 너무 쪼들렸고, 연극은 취미로 하고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직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입학했다.[1]서울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고, 피란간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을 다닐 때도 연극을 해서 생활비에 보탰다.[1]서울대학교총학생회 연극부를 창립하여 연극부장으로서 공연활동에 빠져들었다.[2] 1955년,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이미 2년 전인 1953년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 해군중위(군의무장교)로 임관하였고, 1958년 대위로 전역하였다.[3] 29세 때, 7세 연하로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재학중인 아내 김선희와[4]해군군의관 시절 만난 지 1년 만에 결혼했고, 치과의사 면허자격을 딴 뒤 1958년 서울회현동에 ‘동남치과’를 개업했다.[1]
서울대학교 치대 재학시절 연극을 했던 인연으로 친분있는 연극인들이 찾아오게 되고 연극을 하자는 권유가 늘어갔고, 연극에 대한 열정을 억누를 수 없었던 신영균은 연극 《여인천하》에서 조광조 역을 맡아 무대에 오르게 된다.[5] 당시, 영화 《과부》의 주인공을 물색하던 조긍하 감독이 그 무대를 보게 되고 영화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권하게 된다.[5]
1960년, 조긍하 영화감독의 제안으로 32세의 늦깍이 나이에 영화 《과부》에서 머슴 '성칠이' 역을 맡아 영화계에 전격 데뷔하였다.[1] 이어 출연한 《마부》가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1961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특별은곰상을 수상하고,[6] 1962년에는 《연산군》으로 제1회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차지하며 데뷔 2년 만에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국내외 유수의 영화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그리고 1964년에는 그의 히트작인 《빨간 마후라》로 제11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으면서 국제적으로 통하는 배우라는 인상을 대중들에게 심었다.[7] 1960년부터 1978년 배우 은퇴하기까지 《과부》, 《연산군》, 《열녀문》, 《갯마을》, 《시장》, 《빨간 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번》, 《삼일천하》등 주옥같은 작품을 비롯하여 총 294편의 영화에 출연하여 1960~70년대 영화계의 톱스타로 군림했다.
배우 시절 영화배우라는 직업을 늘 불안하게 여겼던 그는 1963년, 친구와 함께 서울금호동에 동시 상영을 하는 ‘금호극장’을 인수하여 새로 개관하였다.[8][9] 이후 명보극장 바로 옆에 있는 명보제과를 인수하여 이때 부인 김선희 여사가 팔을 걷어붙여 직접 빵을 굽고 장사도 하면서 사업을 키워 나갔다.[8] 당시 명보제과는 뉴욕제과와 태극당, 풍년제과 등과 함께 4대 제과로 꼽힐 정도였다고 한다.[8] 1971년에는 볼링장을 인수하였고, 1973년에는 빌딩관리업체인 '한주흥산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부동산임대사업에까지 뛰어들어 영화배우 못지않은 사업수완을 보였다.[10] 1977년 8월에는 명보제과 바로 옆에 있는 명보극장을 7억 5천만원을 들여 사들인 이후, 《지옥의 묵시록》과 《빠삐용》 등의 외국 영화와 《내가 버린 여자》, 《별들의 고향 2》, 《미워도 다시 한번》 등의 한국영화를 배급·상영하여 대박을 터뜨렸다.[8][11][12] 1985년, 서울종로구관훈동에 지상 14층 지하 4층의 빌딩을 건립하고 지하 2,3층에 명보소극장을 차렸다.[13] 1992년에는 한국에 진출하려는 미국 외식패스트푸드업체인 맥도날드사와 신영균이 함께 49 대 51의 비율로 54억원의 자본금을 투자하여 서울에 합작회사인 '맥신산업'을 설립하였다.[14]
사건·사고
1968년 9월 12일, 이신명 감독을 때려 말썽을 빚은 영화배우 박노식의 처리문제를 두고 서울예총회관 회의실에서 한국영화인연합회 감독분과위원회와 연기분과위원회 연석회의가 끝난 뒤, 영화감독 정진우의 뺨과 입언저리를 때려 여섯바늘을 꿰매는 전치 10일의 상해를 입혔고 재떨이를 던져 동료 배우 황정순, 김지미 등을 다치게 한 혐의로 종로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15][16] 서울시경수사과는 9월 16일, 신영균을 폭력 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하고 영화배우 최성호를 같은 혐의로 불구속, 서울지검에 송치했다.[17] 한편, 피해자 정진우 감독은 경찰에 고소취하장을 제출하였다.
정치 분야 입문
1970년대부터는 좋은 학벌과 든든한 재력을 바탕으로 정치에 대한 야망을 가지고 한국영화인협회,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등의 단체수장 선거에 끊임없이 도전하며 정치권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으며, 1978년 잠정 은퇴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정치행보를 이어나갔다. 1970년,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에 당선된 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부회장으로 당선되었다.[18] 그리고 공화당 소속으로써 서울영등포을구의 조직책으로 발탁되어[19] 출마채비를 갖추었으나, 상대방이었던 김수한 민자당 당무위원을 의식해 도중하차하였다.[20] 1979년, '영화인 권익을 위해 앞장서겠다'는 포부로 한국영화인협회 회장에 단독 입후보하여 선출되었다.[21] 1981년 2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제15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1984년까지 역임하였다.[22] 1993년 2월 제20대 예총 회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23] 1996년에 재선에 성공하여 제21대 예총 회장까지 역임하였다.[24] 1996년, 신한국당에 입당하였다.[25] 제15대, 16대 각각 신한국당, 한나라당 소속으로 비례대표로 당선되어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지냈다.[26][27] 2004년, "새로운 정치를 위해 후배들에게 의자를 물려주고 떠날 때가 됐다"며 총선 불출마를 공식 선언, "이제 다시 영화인 신영균으로 돌아가 문화예술사업에 마지막 힘을 쏟으면서 우리 정치와 한나라당을 위해 계속 관심을 갖고 지켜볼 것"이라고 말하며 정계 은퇴를 시사했다.[28]
영화박물관 건립
1999년 6월 5일, 남제주군 남원읍 바다기슭 2만 4천여평 대지에 사재 100여억원을 들여 한국 최초의 영화박물관인 '신영 영화박물관'을 개관하였다.[29] 2010년, 영화 및 예술계 인재 양성을 위해 500억원 상당의 사재인 서울 중구에 위치한 복합공연시설 명보극장(명보아트홀)과 국내 최초이자 최대의 영화박물관인 제주도 신영영화박물관을 영화계 및 문화예술계의 공유재산으로 기증하여 화제를 모았다.[30]
연극배우 분야 복귀
2012년, 서울대학교 출신 배우 이순재가 주축이 된 '서울대학교 연극동문회' 소속 선후배 연극인들이 모여 제작한 연극 《하얀 중립국》에 출연하여 65년 여만에 연극 무대 복귀하기도 했다.[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