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럭키 금성에 입단하며 프로무대에 입문했다. 1989년 9월 6일 포항제철 아톰즈와의 경기에서 프로 데뷔골을 기록했다. 데뷔 첫해인 1989시즌 팀의 리그 준우승을 이끌며 K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하지만 1991시즌 중반 허리 부상으로 1년 가까이 재활에 매진하면서 1992시즌 중후반이 다 돼서야 부상으로부터 벗어났고, 1993시즌에도 변함없는 기량과 체력을 보여주며 활약하였으나, 1994시즌 다시 허리 부상으로 인해 1년 가까이 재활에 다시 매달려야 했으며, 특히 조영증 감독이 부임하면서 대대적인 팀 리빙딩과 세대교체에 들어가면서 팀 내 입지가 점점 좁아져 갔다.
1995시즌을 앞두고 팀의 주장으로 선임되어 2년간 팀의 주장으로 팀을 이끌었으나, 결국 1997년 5월 전북 현대와의 경기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였다.
이후 국가대표에서 상당히 투지가 넘치는 수비와 플레이로 기대를 모았지만 국가대표팀 전지훈련 도중 치른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평가전에서 오른쪽 발가락 부상을 당하며 결국 1990년 FIFA 월드컵 출전이 좌절됐다.
지도자 경력
1998년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의 수석코치직에 취임하였고, 2003년대전 시티즌의 수석코치직에 취임하여 최윤겸 감독을 보좌하였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누군가 감독과 수석 코치 사이를 벌어지게 만드는 악성 루머를 계속적으로 퍼뜨리고 그 진상 파악을 위해 2007년 3월 수석코치 집으로 찾아가 술을 마시던 중
수석코치의 이마에 지울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구단측은 최윤겸에게 6개월 감봉의 징계를 내린 뒤 둘을 화해시켜 일단락되었다.[1] 하지만 최감독의 진정성있는 사과없이 팀에 합류한 이코치는 마음의 상처를 더 크게 받아야했다. 악성루머까지 나돌게 감독은 방치했고 이것이 이코치의 심적 고충을 더욱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해 결국 2007년 6월 폭행 혐의로 최윤겸을 형사고발했다.[2]
이후 FC 서울의 유스팀인 동북고등학교 축구부 지도자 역임 후 2013년상주 상무의 수석 코치로 부임해 박항서 감독을 보좌하였고, 팀의 2013, 2015시즌 두번의 K리그 챌린지 우승과 승격을 이끌어냈다.
2016년11월 9일최문식의 후임으로 대전 시티즌의 감독으로 선임되며, 대략 10년만에 대전으로 복귀하였다.[3]11월 17일 취임식을 가지며 공식적으로 취임하였다.[4]3월 4일안산 그리너스 FC와의 리그 첫경기를 통해 자신의 감독 데뷔전을 치렀으나, 1:2로 패했다. 3월 18일서울 이랜드와의 경기를 통해 감독으로서의 첫 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 대전은 연패를 지속하며 부진하기 시작했고, 5월 7일경남 FC전에서 패배하여 리그 최하위로 떨어졌다. 또한 4월 22일부산 아이파크전 패배를 시작으로 6월 5일부산 아이파크전까지 총 리그 7연패를 기록하며 극심한 부진에 빠지는 등 좀처럼 리그 최하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6월 13일수원 FC전을 통해 7연패를 끊어냄과 동시에 시즌 두번째 승과 구단 통산 200승을 달성하였다. 8월 5일수원 FC와의 홈경기에서 2:0 승리를 거두며 대략 3개월만에 리그 최하위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리그 최하위로 추락하였으며, 8월 들어 경남과 성남과의 연이은 두경기 서 4골씩, 총 8골을 실점하는 등 다시 부진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8월 31일 성적 부진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다.[5]